유형원이 제시한 향음주례
송지원(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어떤 일에 오랜 세월 종사해서 경험과 공로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일러 우리는 원로(元老)라 부른다. 원로란 그 존재만으로도 한 사회에 안정감을 가져다주기도 하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그런데 원로란 그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한 젊은이가 성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점차 세월이 흐르고, 자신이 평생 종사해온 그 분야에 대한 경험이 쌓이는 가운데 연륜과 덕이 높아지고 인품을 갖추어 가면 일정 세월이 지난 후 비로소 원로라는 호칭이 자연스레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한 원로를 존중하는 풍토 또한 그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진정한 원로가 존경받는 사회를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어 있지 않아 위와 아래가 뒤섞이고,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을 때면 진정한 의미의 원로를 만나기 힘들어진다. 원로를 존중하는 마음 찾기도 어려워진다. 바로 이런 때 혜안을 가진 지식인 집단은 그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여러 대안을 제시한다. 임진왜란을 치르고 난 후 반 세기가 지난 무렵, 황폐해진 향촌사회의 질서회복을 위해 유형원이 『반계수록(磻溪隨錄)』에 제시한 향음주례(鄕飮酒禮)는 바로 그러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제기된 것이다.
향음주례(鄕飮酒禮)란 향촌에 있는 선비, 유생들에게 노인을 봉양하고 학덕 높은 이를 존경하는 뜻으로 연회를 베풀며 행해지는 의례로서, 고을 안의 유생들이 모여 읍양(揖讓)의 예를 지켜 술을 마시는[飮酒] 의례로 자리하게 되었다. 매년 음력 10월에 좋은 날을 택하여 시행했고, 대개 그 고을의 관아가 주인이 되며, 연치가 높고 덕이 있는 이가 주빈이 되고 그 밖의 유생이 빈(賓)이 되어 시행한다. 서로 모여 읍양(揖讓)하는 예절을 지키는 가운데 주연(酒宴)을 벌이면서 계(戒)를 고하는 형식의 예를 갖춘다.
행례(行禮) 하루 전부터 자리를 마련한다. 행례 당일에는 주인이 주빈을 맞이하여 술을 올리고, 순서에 따라 여러 손님들에게 잔을 돌린다. 잔을 모두 돌린 후에는 손님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다. 이 때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시경』의 녹명, 사모, 황황자화와 같은 음악을 노래하고, 또 넉 대의 생(笙)으로 남해, 백화, 화서 등의 음악을 연주한다. 또 나머지 세 곡의 생시(笙詩)인 유경, 숭구, 유의와 같은 음악을 어려, 남유가어, 남산유대와 같은 노래와 번갈아서 연주한다. 이들 음악은 모두 노랫말을 잘 전달하기 위해 한 음절에 음 하나를 붙이는 방식으로 노래한다. ‘어려(魚麗)’는 풍년이 들어 물산이 풍부하다는 내용이니, 풍부한 음식으로 빈객을 융성히 대접한다는 의미가 있다. ‘남유가어(南有嘉魚)’는 태평한 시절에 군자에게 술이 있어 어진 이와 더불어 즐기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남산유대(南山有臺)’는 태평스러운 시절은 현자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예로써 풍속을 변하게 하는 것을, 어찌 번거롭다 하는가?
고을 안의 유생들은 향촌 사회의 노인, 원로를 어른으로 모시고 향음주례를 시행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예를 배우고 공경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유형원은 『반계수록』에 향음주례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의례의 시행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놓았다. 예(禮)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혹왈(或曰)’이라는 형식을 빌려 ‘다른 사람이 의문을 제기한 데에 대한 답변’의 형태로 적어 놓았다. 그 한 가지 예로 “향음주례의 절목이 너무 번거로워 후세에 행하기 어렵지 않겠는가”라는 의문을 상정해 놓은 후 “오르내리고 읍양하는 것이 모두 곡진하게 정한 의리가 있어 세속의 구경거리로 하는 것과는 다른데 이를 어찌 번거롭다고 이를 수 있는가”라고 답한다. 나아가 향음주례의 절차가 번거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라고 유형원은 일침을 가한다. 사람들이 게을러서 지나치게 간략한 일에만 익숙하기 때문에 이를 행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향음주례의 법식이 형식에 치우친 것이라는 당시인들의 지적에 대하여는 이렇게 대답한다. “예로써 풍속을 변하게 하는 것[以禮變俗]”이지 “풍속을 따라서 예를 만드는 것[循俗制禮]”이 결코 아니다.“ 예악(禮樂)의 교화적 기능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향음주례의 실행을 강조하는 맥락이다.
『반계수록』은 숙종 4년(1678) 조정에 알려진 이후 영조대에 들어와서는 양득중의 상소를 통해 『주자어류』 대신 『반계수록』을 강할 것이 요청되었다. 또 권적에 의해 교서관에서 간행할 것이 요청되기도 했으며 홍계희의 청으로 예문관에서 3부를 찍게 되어 이를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아울러 신하에게 반포가 허락되어 중앙에서 주목되는 저술로 자리하였으며 영조 46년(1770)에는 경상감영에서 출판되어 널리 배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정조대에는 지방에 가장 많이 보급된 책 가운데 하나인 『향례합편』이 정조의 명찬으로 저술되어 중앙의 관청 및 문신, 지방의 감영 및 향교 서원에 이르기까지 총 800건이 넘는 배포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향음주례의 전국적인 시행에 대한 인식이 팽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임란 후 어지러워진 향촌사회의 질서회복과 백성의 교화를 위해 예와 악을 모두 갖춘 향음주례 실행의 의미는 단순히 ‘고례(古禮)의 복구’라는 측면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이는 이상사회에서 제정된 ‘고례’라는 틀을 빌려 또 하나의 이상사회로 가고자 하는 ‘상징적 장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에 향음주례와 같은 의례를 시행한다면 번거롭다는 핀잔을 면키 어려울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유형원이 이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그러한 핀잔에 대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형식은 비록 번거롭다 생각되어도 모두 정한 의리가 있어 세속의 구경거리로 하는 것과 다르니 어찌 번거롭다고 이를 수 있는가. 예로써 풍속을 변하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글쓴이 / 송지원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논문: 「정조의 음악정책 연구」 외 다수
· 공역: 『다산의 경학세계』, 한길사, 200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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